
산양의 땅 울진에 가다
12월 17일은 채찍 같은 바람이 매서운 소리를 지르며 날아와 살갗을 때리는 영하의 날씨였다. 겨울의 복판으로 향하던 이날, 녹색연합 신입 활동가들은 울진에 있는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남부지방산림청이 지난 2008년 이곳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한 이유는 수직으로 곧게 뻗어 오른 금강소나무가 빼곡한 숲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연합은 이 지역 주민들과 산림청을 설득해 지난 2010년부터 금강소나무숲길을 조성했다. 이를 위해 녹색연합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탐방객들을 안내하고 숲을 해설할 수 있도록 교육했고,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이 숲길의 특징인 주민 참여형 예약 탐방 제도가 완성됐다. 일곱 개의 구간으로 이루어진 이 숲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 예약을 해야 하며, 각 구간의 탐방객 수는 하루 80명으로 제한된다.
그 땅을 밟는다는 것의 의미
조선 중기부터 건축 자재를 확보하기 위한 황장봉산으로 지정해 벌목을 엄격하게 제한한 덕에 수백 년에 달하는 나이 먹은 숲으로 지켜질 수 있었다. 나이 든 숲은 귀하다. 한반도 전역의 산은 조선 시대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황폐해졌고, 현재 대부분의 숲이 1970년대 정부 주도의 대대적인 식목 사업으로 재조성된 젊은 숲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금강소나무의 땅엔 노루나 멧돼지는 물론 하늘다람쥐, 담비, 산양과 같은 멸종위기 야생동물이 살고 있다. 사실상 한반도에 서식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포유류가 삶을 의탁하는 숲이다. 녹색연합이 이 땅 깊이 곳곳에 설치한 무인 카메라에 촬영된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생물다양성의 보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특히 산양에게는 최남단 서식지이자 휴전선 이남 최대 서식지로 파악되고 있다.
신입 활동가들이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것 역시 다름 아닌 산양의 배설물이었다. 이날 발견한 산양의 배설물은 대부분 수백 개에서 수천 개가 군집된 형태로 있었는데, 이 배설물 군집을 ‘똥자리’라고 칭한다. 산양의 똥자리로 이곳 울진이 국내 최대의 산양 서식지라는 것이 실감 났다. 6 킬로미터 정도를 걸으며 발견한 똥자리만 해도 수십 개가 넘었다. 이렇게 많은 배설물이 발견되는 곳이니, 어쩌면 이곳에서 산양과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안고 챙겨간 망원경을 수시로 눈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산양은커녕 야생동물을 단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했다. 숲이 잎을 모두 떨구고 속살을 훤히 드러낸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며 소리 내는 것이라고는 이 땅을 찾은 우리 활동가 몇 명뿐이었다. 이렇게 광활한 땅에서 단 하나의 야생 포유류와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생동물의 생활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다
우리는 금강소나무숲길을 벗어나 산양이 다닐 법한 비탈길로 행로를 틀어 아주 깊은 곳으로 향했다. 능선을 따라 걸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숲이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소광리와 두천리에 걸쳐 있는 이 땅의 면적은 4,825헥타르로, 녹색연합 본부 사무처가 위치한 서울시 성북구의 두 배와 맞먹는 면적이다. 이는 야생 동물들이 얼마나 넓은 면적을 생활권으로 누비고 있는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몇몇 산양 똥자리에서 확인한 배설물은 몸속에서 배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을 만큼 우리는 산양에게 바짝 다가갔다고 느꼈지만, 자연의 거리 감각은 인간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다. 야생 포유류가 저마다 유지하는 삶의 간격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를 이 비어 보이는 거대한 공간으로 말미암아 짐작할 수 있었다.
산에서 사람이 다니는 매끈한 길을 벗어나는 행위만으로도 전에는 미처 몰랐던 자연을 체감할 수 있다. 가파르고 거칠면서도 미끄러워 금방이라도 이족 보행자들을 내팽개칠 듯한 모습이 본래 산이 가지고 있는 태도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최대한의 안전을 담보하는 인위의 통로를 벗어나 야생동물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보행하고 어떤 형태로 길을 내며 산의 어떤 면모와 동기화된 삶을 살아가는지 가늠하게 됐다. 산양의 똥자리가 발견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고도 700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숨을 죽이면, 고요를 넘어선 적막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될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숲에 살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퇴장한 뒤 홀로 남겨진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깊은 숲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내려가는데 사람의 걸음으로 족히 한 시간은 넘게 소요됐다.
보호구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는 왕피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은 숲에 사는 야생 동물들이 수분을 섭취하는 중요한 거점인 데다가 꼬리진달래와 산작약 등 멸종위기 식물 40여 종이 분포하고 있어 생태지리학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장소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2005년, 이곳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정보들을 들춰 보면 산양 한 마리가 배설하는 자리와 물을 마시는 자리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이들이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냉장고에서 물을 마시고 몇 걸음 만에 화장실에 가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거리를 동물들은 일상의 터전으로 삼아 오간다.
어쩌면 다른 존재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당연하게도 빗나갔다. 산양의 화장실이 얼마나 넓은 지를 확인했을 뿐이다. 그러니 인간의 공간 감각으로 자연과 생태계를 바라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 넓은 영역을 각기 다른 동물들이 언제 어떻게 이용할지 우리로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 땅에서 나온 후 집으로 돌아오며 눈에 새롭게 들어온 것들이 있다. 산을 넘어가며 도시로 연결되는 송전탑들이다.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라며 산을 깎아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모른다. 몰라도 정말 모른다.

글: 최황 (녹색연합 자연생태팀)
*이 글은 빅이슈 코리아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