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운 겨울 국회 앞, 남태령, 한남동, 광화문, 헌재 앞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소리 높여 민주주의를 외치며 함께 싸웠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염원이 담긴 소중한 민주주의를 다시 지켜낼 수 있었다. 그곳에 언제나 녹색연합은 함께 했다. 광장에서 만난 녹색연합 활동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민주주의 지킴이 역할을 수행해 냈다. 거리에서 펄럭이는 깃발 아래 응원봉을 흔들며 소리 외치고, 차량 위에서 집회 참가자들을 독려하며,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거리에서 봉사로 또는 안전을 지키고, 기획에 참여하며, 모금 활동을 하고 수어 봉사를 하면서 이들은 그렇게 민주주의 지켜내고자 했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투쟁의 광장에서 항상 함께 하지는 못하였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든든했다. 녹색연합의 깃발 아래 함께 하는 날이면, 동지들이 함께해서인지 금방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리곤 금방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렇게 나는 녹색연합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 그렇게 녹색연합과 함께하는 나의 두 번째 녹색순례는 시작된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1주기인 이날 우리는 ‘다시 만난 민주주의 생명의 길을 걷다’ 주제 아래 5.18 민주화 운동의 현장인 광주로 향하였다. 이글은 녹색연합의 회원으로서 느낀 순례 기간의 간략한 소회와 4일차 순례단의 아픔의 기억이다.
1일 차 아픔을 시작하다.
첫 발 딛음으로 우리는 아픔의 역사에 한 걸음 다가선다. 5.18민주묘지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고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픔을 시작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선 나는 마음의 무거운 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 여운은 고스란히 우리의 무던히도 무겁던 발걸음에서 알 수 있었다. 대전국립묘지에 있는 아버지와 동생의 묘지를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잊지 못해 매달 찾아간다. 묘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익숙할 터인데 이날 느낀 아픔의 기억은 나의 개인적인 아픔과는 다른 또 다른 슬픔이자 아픔의 기억이었다. 묘지명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그들의 삶에 또 그들의 이야기에 또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게 슬픔의 고통과 아픔의 기억을 첫날 나는 고스란히 맘 한켠에 어느 때처럼 묻어 두고 그렇게 지나쳐 간다. 첫날 아픔의 기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일 차 무등산에 오르다.
무등산에서 바라보는 광주 시내의 모습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이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그 아픔을 이렇게도 부여잡고 잊지 않으려 한다. 그 길을 걷는 우리는 그렇게 아픔의 기억을 놓치지 않고자 그 험난한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무등산에 오른 이유를 잊지 않으려 한다. 이곳에 광주 5.18의 정신이 살아 있다.
3일 차 아픔의 기억을 자세히 들여다 보다. 그리고 그 길을 걷다.
광주 시내 5.18 사적지 구석구석 혹시라도 아픔의 기억을 놓쳤을까, 순례단은 모두 함께 가봐야할 사적지를 나누어 걷고 그 아픔의 기억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1모둠인 난 모둠원들과 함께한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난 아주 오랫동안 한 장소에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다. 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 진입하여 시민군 14명을 무참히 사살한다. 죽임을 당한 14명의 열사들은 16세 고1 학생부터 제일 나이가 많았던 31살의 윤상원 열사까지 대부분 10대와 20대의 젊디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곧 죽을 것임을 무도한 계엄군들이 쳐들어와 자신들이 목숨을 빼앗아 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윤상원 열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어느새 나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하다. 그냥 아팠다. 이 아픔은 오래오래 나의 뇌리속에 남겨질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 아픔의 기억을 되새겨 본다. 윤상원 열사에게 난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고생하셨소. 이제 오늘의 승리는 우리가 해내겠소.’ 안심하고 편히 잠들길 간절히 바란다.
이렇게 3일간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을 기억하며 우리는 그 길을 걸었다. 때론 슬픔과 아픔 그리고 놀라움으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말도 안 되는 아픔의 기록에 분노하고 아파했다. 이 아픔의 기억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의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4일 차 여순항쟁 그 아픔의 기억 속으로,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다.
광주에서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서둘러 다음 아픔의 기억 속으로 한걸음에 달려 간다. 3일 차 광주에서 여수로 이동한 우리는 오동도 내 여순사건 기념관을 들러 여수에서의 일정을 시작한다. 첫 방문지부터 충격적인 사실들에 아픔을 느끼기도 전 놀란 감정을 추스르기에 정신이 없다. 4일 차 녹색순례단은 한화여수공장 14연대 주둔지를 거쳐 안심산 그리고 상관마을로 향하는 걸음을 시작한다. 3일간의 순례로 이미 우리들의 다리와 발엔 물집과 통증이 함께한다. 그깟 물집 쯤이야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다리는 무겁고 아프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에겐 가야 할 아픔의 기억 그 기억의 길이 눈앞에 놓여 있다. 녹색연합의 펄럭이는 깃발 아래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걷게 될 아픔의 길을 묵묵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녹색연합의 깃발은 이렇게 함께 한곳을 바라보고 함께 길을 걸을 때 정말 멋지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도착한 한화여수공장 14연대 주둔지는 여순 10.19항쟁 발발지이다. 제주 4.3 항쟁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가 제주 주민들을 죽이라는 부당한 명령에 항거 봉기하며 여순항쟁을 시작되었다. 이들은 여수 지역에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란 벽보를 붙이고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은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 하였다”고 하였다. 14연대는 경찰과 교전 후 순천으로 이동해 진압군과 교전을 벌이게 된다. 14연대가 떠난 후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는데, 이승만 정부의 군경 진압 과정 및 ‘협력자’ 색출 과정에서 주민들 다수가 운동장에 수용되고 야산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14연대 주둔지는 현재 한화여수공장 내에 있었다. 처절한 역사적 공간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군수품 공장으로 사용되었던 한화여수공장은 일제의 패망으로 빈 막사와 격납고, 굴뚝, 지하 벙커만 남아 있던 것을 미군정이 인수하고 이후 14연대 주둔지로써 이용되게 되었다. 평화롭던 이곳은 강제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일본과 미국에 이어 한국군의 주둔지로 쓰이게 되다가 화약공장이 들어서기까지 민속 현대사의 아픔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우리는 현재 탐방이 가능한 주둔 당시 무기고로 사용되었던 터널을 들어가 보며, 참담했던 역사적 비극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기억하게 된다.

이후 우리는 아름다운 여수의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들 무렵 어느새 다음 목적지인 안심산 초입이다. 우리는 순례 대장의 지시에 따라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가파른 안심산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모두 지쳐 있을 텐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열심히 안심산 정상에 오른다. 역시 무등산에서 보았던 평화롭던 광주 시내와 같이 여기 안심산에서도 내려다본 여수 시내와 여수 앞 바다는 아무 일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시원한 바닷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하산한다. 오름의 성취에 모두 힘든지도 모르고 밝은 얼굴로 다음을 향한다. 안심산 하산길에 위치는 상관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우리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넓은 농지 사이 곧고 길게 뻗어 있는 농로를 따라 우리 녹색연합은 펄럭이는 깃발 아래 당당한 걸음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게 될 숙소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딘다.

오늘도 우리는 아픔의 기억 한 자락에서 그 길을 걸었다. 앞으로 남은 3일. 우리는 여순항쟁의 아픔을 기억하며 그 길을 걸을 것이다. 멈추지 않는 발걸음 그 찬란한 미래를 위해.
*본 내용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기고되었습니다.
*작성자: 녹색연합 장덕표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