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계간지 [본질과 현상], 2008년 가을 호 ‘권두 에세이’로 나온 것임.
<주란 간사의 도움으로 오랜만에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올해 마무리 잘 하시고 복된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이 해의 기억>
기억은 생각의 선택이다. 해에 따라 다른 기억거리를 떠올린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우선 나는 우리나라 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을 달고 역사로 들어선 예순 돌맞이를 꼽는다. 기미년 삼일 운동을 펼치며 독립을 선언한 뒤 스무여섯 해만에 드디어 광복을 맞게 된 겨레의 흥분, 그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땅이 두 동강이 나 서로 총질을 하는 전쟁판이 되었고, 여태 그 갈라진 아픔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오늘, 나는 우리의 정부가 맞는 예순 돌의 역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기억거리를 떠올린다. 사회학을 공부하며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올해가 사회학의 창건자 가운데 하나인 에밀 뒤르케임이 세상에 태어난 지 꼭 백 쉰 돌이라는 점에서 내게 각별하다. 유달리 그의 생각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터이기에 나는 이 해를 맞아 새삼 그의 사회학을 새겨본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기억거리가 또 있다. 모든 시민이 건강을 지킬 수 있게 영국이 국민건강서비스라는 무상의료제도를 시행한 지가 또 예순 돌이 되는 해이다. 아직도 건재하여 온 세계가 부러워하고 있는 제도이다. 나는 이 세 가지를 올해의 기억거리로 꼽고 있다.
아래에서 나는 먼저 영국이 내놓은 사회 정책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어 프랑스의 사회학자를 생각해본 다음, 우리나라로 돌아와 우리의 이야기를 새겨보고자 한다.
<영국의 복지 제도>
영국은 최초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라서 그 후유증에도 제일 먼저 시달려야 했다. 지난날 평온하게 살던 사람들이 산업화의 급물살을 타고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게 되면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공평한 사회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사회 정책이 나왔다. 빈민법도 나오고 국민보험제도도 생겨났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제도가 1948년 7월에 시행된 국민건강서비스(NHS)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니까 제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다음이었다. 나라가 전쟁으로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을 때였다. 나라 형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국민 모두의 사회 보장에 꾸준히 관심을 쏟아 그 문제와 씨름해온 연구자와 행정가, 정치가가 있었다. 1942년에 나온 ‘베브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가 그 결정체였는데, 이 보고서는 질병과 가난과 같은 사회의 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결의를 담고 있었다. 베브리지는 평생 동안 사회 정책을 세우는 일에 몰두해온 연구자였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근로 연령에 해당하는 사람은 모두 국민보험료를 내고, 질병, 실직, 퇴직과 같은 어려움을 겪을 때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누구도 최소한의 생활수준 그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도록 제도의 장치도 마련해 두었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하여 전후 복구 계획을 세우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가장 많은 힘을 기울여 만든 것이 국민건강서비스 제도이다.
이 제도는 국민 모두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의료 서비스를 받아 건강을 유지하고 삶의 품격을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돈이 있어야만 병원에 가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불공평한 관행을 깨버리는 동시에, 돈이 없으면 의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질병 공포증까지 몰아내고자 한 것이다. 이 건강 서비스 제도는 어떤 예외도 두지 않고 모든 국민이 모든 질병에 대하여 모든 치료를 다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는 개인 혼자서 자기의 의료비를 책임지거나 지방자치 단체나 자선 기관이 조금씩 보조해주었던 의료 서비스를 국민건강서비스로 통합하여 국가가 국민의 질병과 그 치료를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실직이나 질병과 같은 긴급한 상황에 대비하여 노동자들이 일정 금액을 내도록 한 1911년의 ‘사회 보험’ 제도와는 달리, 이제 국가가 나서서 사회 보험과 그 혜택이 더 이상 노동자에게 한정되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제도를 확장시켜놓았다. 모든 국민에 대한 건상을 정부가 떠맡겠다는 것이었다. 명실상부한 ‘복지 국가’의 탄생이었다.
영국의 국민건강서비스는 소비에트 체제를 도입하지 않고도 질병의 공포를 추방할 수 있다는 사회 정책의 승리였다. 이 제도의 의미는 국가가 국민의 어려움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국가가 어느 계층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그것을 대변하는 정치 공학의 수준을 넘어, 모든 국가 구성원들이 겪는 어려움을 국가가 나서서 돌보겠다는 가치 관심을 제도로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않고 다가가 그 아픔을 보살펴주려는 책임 가치의 발로인 것이다. 다른 말로, 거의 죽게 된 상처 당한 사람을 보고도 스쳐지나가지 않고 그의 상처를 돌보았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가치 관심을 개인의 수준이 아닌 국가라는 공동체의 수준에서 표명하고 실천하려는 것이 바로 국민건강서비스였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돌보는 일은 이웃이 져야 할 책임의 도덕성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이는 결코 이해타산과 이익 창출의 논리로 움직이는 시장 기제에 맡겨야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웃의 아픔과 그에 대한 치유는 능률성과 효율성을 잣대로 삼는 손익 계산의 영역이 아닌 책임의 가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영국의 국민건강서비스 제도는 이러한 가치 관심에 터하고 있고 그러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이 제도를 받들고 있는 가치 관심은 시장의 거래 행위와 계산법에만 맡겨둘 수 없는, ‘시장 논리에 앞서는’ 이웃에 대한 책임과 ‘시장의 논리를 넘어서는’ 사회 책무에 해당하는 일이다. 아파하는 이웃을 보고도 그 이웃을 상거래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 사회는 분명 치유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려 있다고 해야 한다.
아플 때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복지를 누리지 못하는 나라 사람들은 돈 타령만 하고 돈 계산만 하는 소리에 모두 익숙하다. 가진 자들이 득세하여 그들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하고 그들 중심으로 정책을 수립하기 때문이다. 재원의 충당은 분명 중요하지만 재원의 확보와 예산의 편성은 가치 지평 위에서 이뤄진다. 가진 자들의 가치 지평에서는 언제나 재원이 부족하고 예산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 어떤 계산법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의 재정 형편이 세계 대전 직후 영국이 겪어야 했던 전후의 재정 상태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모두가 버릇처럼 재원을 탓하고 재원의 부족을 들먹인다. 그리하여 아플 때면 언제이고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제도는 우리에겐 언제나 시기상조이고 현실성이 없는 제도로 남아 있다. 이른바 ‘믿음 없는 자’들이 엮어가는 살벌한 나라이다.
근본에서, 재원의 문제는 재원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재원 그 밑바탕의 문제 곧, ‘비재원’의 문제이다. 한 마디로, 가치 관심의 문제이다. 정직하고 투명하게 재산과 수입이 적으면 적은 보험료를 내고 많으면 많은 보험료를 내어, 공동체의 구성원을 함께 돌보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얼마나 값있게 여기는가 하는 가치 지평에 근본의 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국민이 마음 놓고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재원을 국가가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재원을 찾지 않겠다는 국가의 의지 부족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어려운 국민이 겪어야 하는 아픔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국가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며 공공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뒤르케임의 도덕 관심>
뒤르케임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지만 그 안에 평안히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유일한 빛으로 받들면서 그 빛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풀이코자 한 계몽주의가 가볍게 여겨 온 인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와 씨름코자 하였다. 바로 이 문제를 경험 과학의 수준에서 논증하려 한 것이 그의 사회학이었다.
이러한 학문 관심 때문에 그는 당대의 학계를 휩쓸고 있던 고전 경제학과 맞붙어 싸워야 했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개인’을 모든 분석의 단위로 삼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실재하는 것은 개인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뒤르케임의 생각은 달랐다. 개인은 가족과 도시와 국가와 역사와 신앙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개인들을 끌어 모으기만 한다고 곧바로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전체는 그 부분의 합과 같지 않다”고 하고, “사회는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진 특정한 실재”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 그의 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다.
‘사회’라는 낱말을 정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뒤르케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일찍이 사회 이론가 벨라가 쓴 다음의 글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뒤르케임의 저작에서 ‘사회’라는 말보다 더 어려운 말도 없고, 더 평범한 말도 없다.
이 낱말이 지닌 많은 의미와 그 의미의 많은 수준을 파악하는 것은 뒤르케임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거의 맞먹는 일이 될 것이다.” 뒤르케임에게서 ‘사회’라는 말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특정 집단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애매하고 “신비스럽기”도 하다. 이때는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집합체나 그들의 거처”와는 다른 뜻이 된다. 곧, “개인을 통하여 실현되는 모든 종류의 이념, 신앙,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회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주된 존재 이유인 도덕 이상”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이상을 사랑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 사회를 사랑하는 나머지 그 사회가 구현하는 이상을 지켜가기 위하여 차라리 겉으로 나타나고 있는 체제로서의 형태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데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회’는 겉으로 드러난 어떤 물체의 형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어떤 깊은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도덕성과 뗄 수 없는 사회의 속성이며, 그 도덕성의 원천이다. 이 때문에 벨라는 뒤르케임이 쓰고 있는 ‘사회’라는 낱말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경험 과학보다는 고전 신학에 더욱 가깝[다]”고 풀이하기도 했던 것이다.
뒤르케임에게 사회는 결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고결한 도덕 가치를 표상하는 실체였다. 그 사회는 개인의 취향이나 이익 추구의 행위로 결코 축소될 수 없는 더욱 넓고 깊은 가치를 표상하며, 잠시 살다가는 떠나버리는 개인보다 우선하고 개인보다 길고 오랜 영속성과 영원성까지도 담고 있는 가치의 실체이다. 이러한 ‘사회’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상 이 탐구는 피할 수 없이 ‘도덕(성)의 학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남긴 사회학은 세상의 뜬소문이나 한담거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제공해 주는 가볍고 얕은 학문이 아니었다. 사회의 도덕 이상과 가치와 신앙의 영역으로 나아가 그것을 집요하게 파헤쳐야 할 무겁고 깊은 학문이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파헤치기 위한 연구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 학문 자체가 삶의 가장 깊은 뿌리에 이어져 있었던 만큼 그는 변덕스런 시류와 영합하는 정파들의 다툼에 휘둘리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외의 경우가 있었다. 이름 없는 한 유대계 포병 대위가 독일의 스파이였다며 그를 무모하게 기소한 데서 발단된 이른바 ‘드레피스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이었다. 에밀 졸라가 앞장서 드레피스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가 쓴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이 신문의 맨 앞쪽에 실렸다. 꼭 백십 년 전인 1898년 초이다. 이 글은 드레피스 사건을 둘러싼 논쟁에 새로 불을 댕긴 계기가 되었다. 이때 뒤르케임도 논쟁의 한 가운데로 들어섰다.
그때 프랑스는 드레피스와 그를 변호하는 세력을 정죄하는 ‘안보 주창자들’과 힘없는 한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인권 주창자들’로 완전 양분되어 첨예한 갈등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뒤르케임은 이 상황을 프랑스 사회의 도덕 위기로 보았던 것이다. 프랑스 공화국이 표상하는 도덕 가치를 거꾸로 돌려놓고자 하는 세력에 맞서 그 가치를 다시 분명하게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내면의 도덕 관심과 책임 의식에 그는 침묵하고 있을 수 없었다. 저 유명한 “개인주의와 지성인”이라는 그의 글은 이때 나온 것이다.
그는 먼저 개인의 권리를 존중코자 하는 지성인들의 주장을 ‘개인주의’로 규정하고 이것을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로 을러대며 몰아세우고 있는 보수파의 논지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이기주의와 구별되는 참다운 개인주의는 사회의 혼란을 낳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통합의 도덕 바탕을 제공한다는 논지를 폈다. 그는 이 도덕을 ‘인간성’(humanity)에 터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사로운 관계를 뛰어넘고 이기성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곧 ‘인간성’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좁다란 ‘자기’라는 개별 존재의 테두리를 벗어나, “모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어 갖는 더욱 높은 원천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 자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동료 가운데 널리 들어가 있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연관을 맺지 않고는 자기의 행동 목표로 이를 채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는 자기가 동시에 “대상이 되고 집행자가 되는” 종교의 뜻을 지니고도 있다. 이 가치가 자기라는 “개별 존재가 아닌, 어디에서 찾든지, 그리고 어떠한 형식으로 구체화되는지 간에 인간의 인격에 호소하게 된다”고 주장 하였다. 뒤르케임은 이 도덕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사회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흔히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 통합은 공동체다움을 지켜가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갈기갈기 찢어진 사회를 하나로 엮고 묶을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실로 간단치 않다. 그러나 그 방향은 분명하다. 여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힘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몰아가서는 결단코 사회의 통합을 이룰 수 없다. 여유를 갖지 못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힘없는 자들의 삶을 보듬어 주는 도덕 관심을 확보할 때만 평화롭고 부드러운 사회의 통합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나서서 돌보고 보살피는 참 이웃됨의 공동체다움이란 찾을 길 없는 오직 강압과 억압을 수단으로 한 강제된 통합의 체제만 덩그렇게 서 있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가 안보와 질서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나라의 안보가 위태롭다고 하여 모든 사람 속에 간직되어 있고, 따라서 함께 지켜가야 할 인간의 귀함까지도 짓눌러버린다면 그 사회는 오직 겉으로만 통합되어 있을 뿐이다. 안보와 질서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보해도 좋다고 하는 그 흔한 주장에 복종케 하는 사회는 뒤르케임의 뜻에서 결코 통합되었다고 할 수 없다. 허울 좋은 안보와 질서의 체제 밑에 시달림을 받으며 저 만치 멀리 밀려난 변두리의 힘없는 인간 모두에 대한 가치 관심으로부터, 비로소 참된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60돌>
우리나라 정부가 예순 돌을 맞는 그 날이 오면 우리 모두 밤하늘을 장식할 불꽃놀이를 보게 되고 요란한 축포 소리도 듣게 될 것이다. 자축하는 갖가지 행사도 곳곳에서 열릴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예순 해의 역사는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는 그 동안 일찍이 역사에서 앞선 보기를 찾아볼 수 없던 여러 영역의 변화와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단과 전쟁과 냉전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우리가 성취한 것은 어느 하나둘이 아니다. 수많은 시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보편 가치를 제도의 수준에서 배우고 제도로서 정착도 시켜놓았다. 이것은 1960년 ‘봄 혁명’과 뒤이은 1980년과 1987년의 민주 항쟁 운동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기대어 독재 정권도 무너뜨리고 총칼을 휘두른 군사독재 세력도 허물어버린 억세고 당찬 겨레이다. 이 민주화 투쟁의 역사와 함께 우리가 내세우는 것이 또 있다. 우리가 이룩한 경제 성장이다. 그야말로 폐허 위에서 민주주의도 세우고 또 경제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영역에서 우리는 아직도 다하지 못한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안보니 질서니 하는 주의주장 앞에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손쉽게 허물어질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민주주의는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힘 있는 사람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툭하면 내세우는 이념 공세 앞에 민주주의는 그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각색되곤 한다.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온갖 방식으로 규탄하고 이단자라는 무서운 딱지까지 붙여댄다. 여태까지도 가시지 않은 지난 시대의 찌꺼기지만 그것은 불시에 솟구쳐 나와 맹위를 떨치곤 한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경제 가치가 으뜸으로 강조될 때도 쉽게 뒷전으로 밀려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경제를 살리려면 다른 가치 영역의 포기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순순히 받아들였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군사 쿠데타 세력이 가난을 몰아내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선전하고 나왔을 때, 우리는 그때까지 귀하게 여겨왔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쉽게 내동댕이쳤다. 민주주의는 경제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나 통용될 가치이지 가난을 해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맞지 않다고 한 말에 모두 홀랑 넘어갔다. 권력을 비호하던 지식인들이 주저 없이 쏘아댄 그 주장에 따라 우리는 구미 민주국가의 경제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민주주의는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사치품목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그들의 주장을 믿고 따랐다. 우선 먹고 살아야 민주주의도 있는 것이라며 경제 가치를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라고 그들이 선전해댈 때 우리는 모두 그 경제의 가치에 무릎을 꿇었고, 스스로 나서서 그 경제 지상주의의 가치를 전파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경제를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광풍에 여지없이 휘말렸다.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과거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도 그 위력을 마구 뿜어내고 있다. 흔한 말로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또는 ‘경제를 키운 공로가 있기 때문에’라는 조건을 잘 달아놓기만 하면, 우리는 따져 물어봄이 없이 다른 가치의 문제는 쉽게 지나치거나 덮어버려도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지난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은 그 ‘군사 쿠데타의 지도자’라는 믿음을 어떤 흔들림 없이 지켜오고 있다. 우리는 경제를 제일의 가치로 여기며 살았던 그 시대의 의식 세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그 가치에 스스로를 붙박아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익숙하고 가장 호소력 있는 언어는 물질로 잘 사는 ‘경제’의 가치와 논리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제 일의 언어’이다. 실제로 우리가 이룩한 경제 성장은 이 지배 언어를 구호로 삼아 국민을 통째로 동원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우리는 모두 경제의 여유와 부를 얻기에 여념이 없다. 그것도 언제나 자기 집안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부를 획득하는 방식은 가족만을 위하는 데 머물러 있어 가족을 단위로 하여 벌이는 경쟁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자기 집안을 중심으로 부를 추구하고 획득하여 그것을 지켜가고자 하는 데 모두 혈안이 되어 있다. 집안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넘어, 이웃한 일반의 여유와 부를 생각하는 데까지는 좀처럼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러한 관심 영역의 확장을 북돋아줄 수 있는 언어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물질의 부를 겨냥하는 그 지배 언어에 맞서고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의 제 이 언어, 곧 ‘보살핌’이나 ‘돌봄’, ‘이웃됨’, ‘책임’, ‘공동체’와 같은 언어는 쉽사리 우리 사회의 언어 마당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제 일의 지배 언어 이외의 다른 언어는 모두에게 몹시 낯설고 생경할 뿐더러 불투명하여 전혀 힘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도덕 관심이 비좁은 공간 안에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언어의 상황은 우리의 의식 상황을 나타내며 우리의 가치 지평을 비춰준다.
우리는 제 일의 언어에 사로잡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넓은 가치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기며 따돌릴 뿐이다. 이것은 개인의 행위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집합체의 정책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제 일의 지배 언어 그 너머 다른 언어를 제공해 줘야 할 종교 영역에 대해서도 기대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종교 영역이 세속의 질서에 대해 긴장을 자아내기보다는 그 질서에 동조하고 그 질서를 옹호하고 후원하며, 나아가 유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 지배 언어에 대한 도전과 초월의 능력과 가능성을 자체의 전통 속에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미 있는 대안의 제 이 언어로 소통시키기보다는 제 일의 지배 언어 속으로 스스로 퇴거하여 그 안에 매몰되어버리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 조직에서도 물질의 복을 부추기며 교중의 환심을 살망정, 그들에게 익숙한 지배 언어를 넘어서서 참 이웃이 되자는 대안의 언어를 강조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힘없는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이웃 일반에 대한 가치 관심의 지평을 확장해가기란 몹시 어렵다. 남의 집안이 저렇게 잘 산다면 우리 집안도 저렇게 잘 살도록 경쟁해야 한다는 욕심 이상으로 더 강한 동기는 없으며, 그 획득 동기를 넘어설 수 있게 깊은 차원에서 도전하는 도덕 능력도 없다. 자기와 자기 집안의 안녕과 복리에 대한 가치를 일차의 것으로 여겨 여기에 모든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에는 열성이지만 그 좁은 관심의 지평에서 벗어나 이웃 일반의 안녕과 복리에 대한 가치 관심으로 나아가 거기에 에너지를 모으려 하지는 않는다.
남들이 누리는 경제의 부를 누리지 못하면 금세 기가 죽어버린다고 생각하는 졸부 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면, 모두들 그 기를 살리기 위하여 무엇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러한 경쟁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별 탈 없이 쑥쑥 상승의 사닥다리를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열려있는 무한한 기회의 사닥다리가 아니다. 이른바 다문화 집안의 아이들과 외국 노동자들, 북녘 땅을 벗어나 남녘으로 온 탈북자들, 길거리로 내몰린 노숙자들, 비정규직 사람들, 일자리에서 내쫓긴 사람들, 누구도 이들에게 왜 사닥다리에 오르지 못하고 떨어지느냐고 나무라지 못한다. 남을 밀어내고 올라선 힘 있는 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회를 엮어가는 한,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길거리를 배회할 수밖에 없는 낙오자의 양산은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경쟁 그것에만 사회를 맡겨둘 수 없다. 경쟁이 시장의 틀을 움직여갈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이 곧 ‘사회’의 규칙이 되고 공동체와 국가의 지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시장 논리를 주창하며 시장 모형에 가까워지고자 해도 모든 삶을 그 논리와 모형 안에 다 담아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이웃은 수지타산의 대상이 아니며 단순한 거래자이나 소비자도 아니다. 우리는 이들 모두를 공동체의 새 구성원이자 이웃으로 함께 보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책임의 시대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지난 60년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새 도전 앞에 서 있다.
<가치와 삶>
내게 올해는 세 가지 기억거리를 떠올린 해이다. 질병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국민건강서비스 제도를 만든 영국의 이야기, 좁은 가치 관심을 넘어서서 인간 일반에 대한 가치 관심을 학문의 중심 과제로 삼은 사회학의 창건자 이야기, 그리고 우리 정부가 세워진 지 예순 돌 된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쟁에 능한 날쌘 경쟁꾼들에게 편리한 경쟁 체제로 급속히 변하고 있다. 지난 60년의 역사에 대한 기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는 경제 성장이라는 지배 언어가 석권하면서 대안의 언어 가능성이 송두리째 파손된 과정이기도 했다. 가치의 지평이 좁다란 자기와 자기 집안 중심의 테두리에 갇혀 그 너머 이웃 일반에 대한 도덕 관심을 북돋울 가치의 자원조자 잘 보이지 않는 이 때, 우리는 경쟁 체제에서 배제되고 있는 힘없는 외로운 사람들의 삶 바로 거기에서 도덕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 이외에는 다른 가능성의 빛이 보이지 않는 칙칙한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 행위는 선택 행위이며, 그 선택 행위는 곧 가치의 문제이다. 가치 지평에 따라 그 안에 들어올 기억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기억도 있다. 기억은 언제나 가치 지평 위에 있다. 어떤 가치 지평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기억의 항목과 내용은 다르기 마련이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속에 나의 가치 지평이 있다.
내가 선택한 이 해의 기억거리 셋은, 나의 가치 지평이며 그 가치 지평의 반영이자 그 가치 지평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2008.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