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적힌 내용이, 요즘 제 마음속 무력감을 콕 찝어 얘기해주셨다.
박선생님은 지금도 길위에 서 있다고 하셨다.
68세에 자신이 가졌던 두가지 사상중심이 흔들리고 자신감을 상실하였다고.
있는 힘을 모아 다시 시작하여 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열심히 진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다보니 답은 나오지 않고 물음만 많아졌지만 그래도 좋다 했다.
길찾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이 따뜻해졌고, 답은 못찾았지만 길을 찾는 자는 그 찾는 힘으로 잘 살아 갈 수 있다는 말이 오래 남는다.
요즘같은 시국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나에게 길을 찾아가는 힘으로 설레임있게 살 수 있을거라는 건
또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씀이었다.
나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이고 구조의 문제인지라 같이 힘을 모아야되고, 우리 서로 도와야한다는 말씀도
앞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있는 시점에 녹색연합 같은 시민 활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섣부른 해답을 가지는게 훨씬 더 위함한 것이고,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인생에서 발견하지 말고 발명하라는 것… 기존의 방식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새로운 눈으로 만들어 내는 것.
아직 이해되지 않는 세상모습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야 한다면
오늘 박성준 선생님의 인생사를 들으면서 그 분이 어떻게 삶을 대하고 계시는지
하나의 방향을 볼 수 있었던 것이 꽤 의미가 있었던 강의였다.
길담서원도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노을지는 하늘 바라볼 수 있는 그 곳에서 팔십의 인생, 남은 오년을 준비하실 모습 어떤 공감으로 다가 올지 가서 보면 더 인상적일듯.
인생의 공부는 끝도 없구나 다시 한번 되새기며. / 강윤경
나이든 사람이 한마디 하는게 누가 될것 같아 자제할려고 해도 오늘은 그냥 넘어 갈 수 없어 한 말씀 하는것 양해 바랍니다.
선생님에 대한 간단한 프로필을 보고 강의가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했지만서도 그렇게 감동적일줄을 몰랐습니다. 어찌보면 개인으로서 최악의 불행을 뛰어넘어 자기 완성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그리고 난 후 혜안의 지혜가 번뜩이는 공부하는 75세 해맑은 소년의 말씀은 입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적 강의를 하신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란한 수사도 ,원망의 목소리도 없이 추상적인 구름잡는 소리도 아니면서 소박하고 겸손한 말씀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눈물어린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을 인생을 논 할 자격이 없다고 했던가요- 고생을 안해 본 사람의 이야기는 깊이가 없다고 하는데 이와 정 반대인 선생님의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울림이었습니다.
속물 군상들의 가장 약점이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폐부를 찌르는 말씀, 당신이 지금까지 의지하던 2대 축 즉 종교와 학문에 대한 의지를 접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셨다는 솔직하고도 용기있는 말씀, 아직도 길을 찾고 있다는 겸손의 말씀은 들었을 땐 미국 위인전에 나온는 "큰 바위 얼굴"이야기가 떠 올랐습니다. 자기가 평생 찾고 있던 사람은 못찾고 결국은 자기가 이미 찾고자 했던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로 기억합니다만 선생님이 그런분이라고 하면 제가 오바하는 걸까요. 인생에 있어서 목표 달성도 중요지만 더 중요한것은 그 과정이라고 들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슨 거창한 일이 아니라 자기부터 자기가 할수 있는 또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공동체를 통하여 개선 또는 개혁을 하고 종국적으로는 니체가 말하는 새로운 인간 유형인 위버멘쉬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라고 말씀하신것 같은데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무는 해를 말씀하셨습니다만 누가 나이는 뺄셈, 행복은 덧셈,돈은 곱셈, 웃음은 나눗셈이라고 했습니다.. 나이 잊으시고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주시죠. 강의 중 말씀하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책세상. 을 사놓고만 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어 봐야 하겠습니다.저에게는 아무래도 독일어원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요. 근일간에 독일어 공부하는 자극을 받기 위해 길담서원에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 안병학
교수님께서 기본소득에 대해 동영상을 찾아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개념도 없었는데 강의이후 인터넷을 통해 내용을 찾아보게되고 교수님 께서 꽃다운 그대들이 못할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신것에 제 생활을 반성하는 시간도 되었습니다. 또한 웃음과 행복함을 느낀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웃을 줄 아는 인간이 되기 위해, 공부합니다.
5년 전 2월 25일. 그 날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네, 아시는 분이 계시는 군요. 2월 25일은 대통령취임식이 있던 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길담서원이 통인동에서 문은 연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 눈이 폭설이 내렸습니다. 신문에선 청와대에 입성하는 새 대통령을 축하하는 눈이라 했지만, 우리는 길담서원을 축하하는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복궁 옆, 세종대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이 동네, 청와대 근처인 이 동네가 너무 가벼워지는 것 같아 길담서원은 종이를 움직이지 않게 눌러놓는 문진처럼 이 거리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곳이라고 여기고 길담서원의 문을 열었습니다. 돌아오는 5년째엔 더 기쁘게 길담서원 여는날을 축하하리라 했는데, 올해, 그렇게 되진 못했지요.
저는 일제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솔가한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 있는 남정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곳을 다시 갔더니 너무 작은 학교더군요. 저희 부모님은 일제시대 때 옥살이를 하시기도 했던 분인데, 해방 후 미군정 3년 동안 저희 집에선 종종 무장한 미군들이 와 가택수색을 하고 부모님은 연행되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부모님이 연행되고 나면 어린 아이들끼리만 며칠씩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자 어렸던 저와 제 동생은 조부모가 계셨던 경남 통영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나고, 그게 부모님과 위의 형제들과는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릴 때 거의 먹지 못해 학교에서 쓰러졌던 적이 있습니다. 깨어나보니, 여선생님들이 저에게 미음같은 걸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후로 여선생님들이 늘 밥을 따로 모아 이건 성준이꺼라고 남겨두어 그걸 먹고 학교 급사로 일하며 초등학교생활을 마쳤습니다. 초등학교를 끝내고 나선 학교를 가지 못했는데, 초등학교 건녀편에 있던 중학교에서 학교에서 일을 하면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해 다시 중학교의 급사가 되어 학교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숙직실 옆이 바로 음악실이었는데, 아침마다 피아노 연습을 하던 여학생들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지금 길담서원의 음악회가 열 수 있었던 배경이지요.
그런데 그 중학교에서 도난 사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경찰서에 가서 취조를 당하게 되는데, 그런 의심을 당하자, 그간의 설움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 부모를 잃고 늘 배가 고팠던 아이가 얼마나 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 설움이 터져 왕 하고 울어버리자 경찰도 어쩌지 못하고 그만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나왔지만, 다시 그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지나가던 트럭을 얻어타고 무작정 갔는데, 그곳은 미군의 구호물자를 받아 입고 먹고 하던 곳, 구호물자인 청바지를 모두가 입던 곳, 바로 고아원이었습니다. 고아원에 갔기 때문에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지요. 저는 이제 청바지를 입습니다. 길담서원에 있기 때문에 조금 젊게 보이려고 염색도 하고 청바지도 길담서원 문 여는 그날부터 늘 입습니다. 그러나 이 청바지는 저에겐 오랫동안 상처였습니다. 고아원에 가서 학교는 무상으로 갈 수 있었지만, 책도 없고 노트도 없고 펜도 없었습니다. 고아원에선 10시면 불을 다 끄기 때문에, 불을 안 끄는 유일한 장소인 화장실 앞에서 밤마다 가장 싼 종이를 구해 접고 오려서 노트를 만들고 선배들에게 책을 빌리면 며칠내에 그걸 다 옮겨 적어 내 책을 만들어 그걸로 공부를 했습니다. 늘 남이 쓰다 버린 뭉툭해진 펜촉에 잉크를 찍어 써서 펜을 꽂았던 가슴팍의 주머니는 늘 퍼렇게 물이 들어있었습니다. 모든 책을 그렇게 옮겨 적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저는 베껴 쓰는 것에 아주 놀라운 기술이 있습니다. 이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감옥살이를 했는데, 제가 재판을 받을 때, 지금은 길담서워에서도 다 팔고 있는 그런 책을, 원래 습관대로 옮겨 적은 것을 수북이 갖고 있던 저는, 보균자가 되었습니다. 사상의 보균자가어 저 놈은 절대로 사회에 내놓으면 안된다고 재판을 받았지요. 그래서 15년형을 받고 13년을 형을 살고 나왔습니다.
지금 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건 제가 예순이 넘어서부터입니다. 제가 감옥에 갔던 이야기 같은 건 다 알지만, 어린 시절 몇 가지의 상처를 저는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살았습니다. 저는 이제사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상처란 그렇게 지독한 것입니다.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 껍데기입니다. 웃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은 웃을 수 있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인문학을 배우면 웃을 수 있게 됩니다. 웃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는 어림짐작으로 되진 않습니다.
15년 형을 받고 13년 감옥살이를 한 후, 다시 형을 받은 만큼의 보호감찰기간 15년, 30년을 거치고 나서야 저는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한국사회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어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보호감찰기간이 끝나고 여권발급이 가능해지자 바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나가 살다 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게 2000년대 초반인데, 그때 정말 이제는 한국에서 뿌리내리고 살아보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학교라는 프로그램도 하고 성공회대에서 평화학도 가르치고 아름다운 재단 일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65세에서 68세 그 사이 저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엔 무언가 꿀벌이 꿀을 나눠주듯이 사람들에게 나눠 줄 것이 있었는데, 몇 년 뒤, 저는 길을 잃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신앙과 맑스주의라는 경제학이 저의 생각의 근원이었는데, 그조차 모르겠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혼에 넘어가는 해 같은 그 나이에, 비로소 나는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길찾기의 마음으로 68세에 저는 철학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길담서원의 문을 열었습니다. 니체를 읽기 위해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어로 공산당 선언을 읽고 어린왕자를 두번 읽었습니다. 앞으로 여덟 번을 더 읽을 것입니다. 요즘은 영어로 슈마허의 Small is Beautiful을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책을 다 읽었다 생각하실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책은 그렇게 쉽게 자기 속살을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니체를 만났습니다. 길담서원엔 <니체와 왈츠>라는 공부방이 있어 거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독일어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세월호 사고를 통해 보여준 여러 인간 군상들이 다 나옵니다. 마치 엑스레이로 찍듯이요. 좋은 책을 만나는 건 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는 그런 겁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그런 책입니다.
오늘 가져온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을 보면, 이미 읽은 분도 계시겠지만 다시 읽어보시면, 이제까지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이 책 뒤 표지에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지금 우리 세월호 참사, 많은 이야기가 무성하죠. 정작 우리 무력감 느끼지 않습니까?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예요. 우리 민주주의 하고 있습니까? 지금. 더글라스 러미스라는 분은 정면으로 우리에게 “민주주의 하고 있습니까? 진짜 민주주의 아닙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아닙니다. 진짜 민주주의 해야 합니다” 하고 있어요.
요즘, 우리가 겪은 이 참사에 대해 어디에서든 이야길 합니다. 길담서원의 한 모임에서 한 사람이 패턴이 똑같다 이야기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을 때와, 미안하다, 잊지 않겠다, 바꾸겠다 했지만, 결국 하나다 바꾸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가장 나쁜 방향으로 이 사건이 정리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바로 인문학입니다.
정규학교가 아닌 학교를 시도하는 사람들, 진정한 배움, 진정한 가르침. 이것이 무엇인가 제대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학교를 열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다가올지 알려면 진정한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악세사리가 되는 공부가 아닌 공부. 지금 그런 학교가 없다면 우리는 ‘발명’해야 하는 때입니다. 발견하려하면 다시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발명에 있어서 내 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내 삶을 내가 살아야겠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내 공부를 내가 발명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길담서원을 열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음은 많습니다. 길찾기를 하고 있어서 마음이 따뜻합니다. 그리고 정말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을 찾는 자는 그 찾는 힘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혼자서 할려하지 말고 길담서원같이, 지금의 공부모임같이,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해야 합니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같이 배를 탄 사람으로서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