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녹색순례 ‘다시 만난 민주주의, 생명의 길을 걷다’] 1998년부터 해마다 봄이 오면 녹색연합 활동가들은 녹색순례를 떠납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오염으로 훼손된 상처받은 환경 현장, 투쟁의 현장을 찾고, 지켜야 할 자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생태감수성을 또렷이 합니다. 그렇게 녹색 활동의 힘을 다시 충전해 왔습니다.
올해 걷는 제25회 녹색순례는 겨우내 다친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으며 민주주의의 길로 떠납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길, 1019 여순항쟁의 길을 걸으며, 거대하고 숭고한 역사와 운동을 다시 만납니다. 생명의 편에서 비폭력 평화, 녹색 정치란 무엇인지 묻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길을 만들어갑니다.
‘엄마, 나 낳았을 때 세상은 어땠어?’
수원대, 한신대 근처만 지나면 최루탄 연기가 매캐했다고 합니다. 무섭진 않았냐고 물으니 “그냥 내 할 일 하느라 바빴지. 무서울 짓을 안 하면 뭐가 무서워.”
저는 1987년 6월에 태어났습니다. 음력 생일은 5월 18일입니다. 공교롭지요. 이 날짜들이 갖는 무거운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역사적인 날에 태어났네’ 생각하며 은근히 기뻤습니다. 민주주의와 항쟁의 역사를 배운 날에는 집에 돌아와 엄마 아빠에게 그 엄혹한 시절에 뭘 했느냐고 묻고는 작게나마라도 국가 폭력에 저항했노라는 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철도 없이 그랬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인 부모님은 당시 수원에서 작은 복덕방을 운영하며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지요. 국가를 겨냥해 짱돌을 던지거나 도망치는 학생을 숨겨주었다는 답은 끝내 듣지 못했어요. 폭거에 항의하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 부정의를 마주쳤을 때 비겁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로부터 끝내 기대했던 답을 듣지 못한 저는 사는동안 내내 생존과 실존을 저울질하곤 했습니다. 풋내나는 반골 기질로 쉽게 그리 생각했습니다.
작년 12월, ‘123 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저는 뉴스 보도를 보는것조차 버거워 이불 속에 숨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계엄의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강렬한 분노도 느꼈지만, 그보다 부피가 큰 두려움에 짓눌렸습니다. ‘일단 짐을 싸서 피신해야 할까? 이 시간에 강아지를 데리고 어디로?’라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언제나 실존을 더 앞세워 살아야 한다며 떠들고는 정작 이렇게 생존을 끌어 안고 쉽게 놓지 못합니다. 저는 그 시각, 두려움을 무릅쓰고 국회로 뛰쳐나간 동료 활동가들과 시민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 빚 뿐일리가요. 부모님이 ‘무서울 짓’을 안 한 대가로 진 빚, 저는 그 빚을 밑천으로 자랐을 겁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태어난 해와 날의 무게를 지긋이 가늠해 봅니다. 5월의 광주에서 민중이 보여준 절절한 용기와 연대는 국지적 역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어 이 땅 깊이 자리 잡았고, 그 정신은 87년 6월항쟁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국가의 거대한 폭력을 똑바로 마주하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맹렬히 목청을 높인 그 정신이 결국 2024년 12월의 국회 앞으로 시민들을 모았습니다. 소설가 한강의 말처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자가 산자를 구한 것이지요.
그 날, 그 정신이 짓밟혔다면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당연함이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123 계엄 사태’는, 그 당연함이 얼마나 어렵게 만들어진 민주주의로 지탱되고 있었는지를 체감케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형의 제도일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과정으로만 존재한다는 걸 다시 배웠습니다.
우리는 광주로 갑니다. 우리가 짊어진 귀하디 귀한 빛 마저 잃을 뻔한 아찔한 겨울을 뒤로 하고 빛고을의 봄으로, 그 위대한 계절로, 그 아픈 흔적을 온 발걸음으로 마주하러 갑니다. 이 걸음이 언젠가 다시 만날 세계의 누군가에게 용기의 씨앗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빚이 유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를 다시 만나며, 생명의 길을 걸읍시다.
제25회 녹색순례 대장 배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