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날 녹색순례단은 5.18 국립묘지를 시작으로 광주 시내에 남은 그날의 기억들을 걸었다. 몸은 긴 도보로 지쳐 있었지만, 숙소에 돌아와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하던 날, 어린 학생들을 돌려보낸 뒤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키다 산화한 윤상원, 목숨 건 가두방송으로 광주 시민의 참여를 호소했던 전옥주의 묘소가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광주의 아픔과 희생을 겪고도 민주주의가 다시 계엄 앞에서 위기에 처했던 지난 상황은, 별다른 노력없이 ‘시민의 권리’를 누려왔던 내게 다시 역사를 돌아보게 했다. 마음 한 켠에 그 이면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내친 걸음 멈추지 않고, 녹색순례단과 끝까지 일정을 함께하고자 마음 먹었다.

순례 이튿날, 다음 걸음을 내딛은 곳은 무등산이다. 광주 시내의 동쪽을 부드럽게 에워싼 이 산은, 오랜 시간 눈 앞의 도시에서 펼쳐졌던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온전히 지켜본 묵묵한 증인이기도 하다. 멀게는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의 한 거점이 되었고, 가깝게는 군부독재와 5.18까지 지난한 인간사의 흔적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래서였을까? 무등산이 긴 세월 광주와 함께했듯, 광주 시민에게 무등산은 괴로울 때 시내 어디선가, 고개 들고 바라보며, 기댈 수 있는 존재기도 했던 것 같다. 도심을 가로질러 점차 가까워지는 산의 전경을 응시하며, 지금은 지상에 없는 한 시인의 시를 생각했다.
“밤 12시/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학살 1’ 중에서)
시인 김남주는 그날의 사건 앞에서 무등산을 떠올렸다. 한평생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살다간 그에게, 그 순간의 ‘무등’은 참혹한 광경 앞에서 아픔을 삼킨 채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릴 수밖에 없던 존재였다. 여기서 무등산은 자식을 눈 앞에서 잃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감옥에 기약없이 수감중이었기에, 당장 달려가서 광주에 손 내밀 수 없었던 시인의 처지가 투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잠시 상념에 빠진 채 걷던 사이, 수많은 생명체들의 보금자리인 무등이 아름다운 녹색의 빛깔을 발하며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도착한 순례단을 맞이해준 것은 무등산 생태계 보전을 위해 활동하는 광주전남 녹색연합의 김영선 대표였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 안에서도 특별구역으로 지정된 ‘평두메 습지’ 이야기를 듣는데, 그 내력이 특이했다. 오래 방치되어 버려진 논이 자연천이를 거치며, 멸종위기 야생생물과 식물 수백 종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된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그 보전 가치를 인정 받아, 2024년 5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는데, 김영선 대표는 이 과정에서 매년 평두메 습지 생태계를 조사하고, 보도자료를 냈던 시민과학자의 역할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한편 무등산에 오랜시간 군부대가 주둔해서 크게 훼손된 천왕봉 문제, 과도한 정상부 훼손을 막기 위한 정상부 탐방예약제 도입, 저지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탐방문화를 개선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막연한 관념의 자장 아래서 무등산을 보던 내게, 구체적인 환경 현장으로서의 면모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밥은 하늘입니다/하늘은 혼자 못가지 듯이/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이어서 무등산을 등반하던 순례단은 바람재 구간에서 식사를 했다.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일상적인 행위 중 하나지만, 순례 중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함께 땀을 흘리며 걷고, 먹을 것을 나누어 먹으며 공생의 가치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날은 다함께 점심 도시락으로 주먹밥을 준비했는데, 5.18 당시 시민들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함께 주먹밥을 나눠 먹던 연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내려지던 날, 처음 방문했던 광주의 금남로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주먹밥을 나눠 먹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역시 또 한 번의 탄핵을 거치고 나서, 광주에서 순례단과 함께 먹으니 기분이 묘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배고픈다리’(현 홍림교)라 불리는 곳을 지났는데, 이 특이한 이름은 당시 사람들이 지면보다 꺼진 다리를 보고, 자신의 배고픈 처지와 동일시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 역시 5.18 사적지로 당시 시민군이 계엄군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교전을 벌였던 장소였다. 어떤 풍경에는 상처가 깃들어 있다고 했던가? 광주 시내 곳곳에 위치한 그날의 기록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시민들 사이에 녹아 있었다. 무언가를 정복한 영웅이나 혁명가가 아닌, 당장 눈 앞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던질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시민들’. 바로 그들에게 녹색순례단은, 다시 민주주의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 본 내용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기고되었습니다.
* 작성자: 본부 녹색연합 박상욱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