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성지를 찾아 떠난 녹색순례 3일차. 가방에 덜 마른 양말과 수건을 매단 순례자들이 뜨거운 햇빛 아래로 모였다. 이번에는 전체가 같은 길을 걷는 대신 네 모둠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 오월길의 다양한 사적지를 탐방하고 직접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오월길은 5·18민주항쟁 사적지 27곳을 연결해 만든 길로, 크게 다섯 테마(오월인권길, 오월민중길, 오월의향길, 오월예술길, 오월남도길)로 나뉜다. 각 테마는 또 2~5코스로 나뉘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탐방할 수 있다.
광주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려면 오월길 앞으로 오라. 직접 걷지 않고는 비극이 감히 이 땅에 닥쳤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이렇게 따스하고 고요한 광장에 45년 전 휘몰아친 폭력과 잔혹함이 있다. 이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 광주에 살아 숨 쉬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감히 그 입으로 계엄령을 뱉을 때 우리는 모두 광주를 떠올렸다. 여전히 폭도나 빨갱이 같은 헛소리로 짓밟히고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전일빌딩에 내걸린 한강 작가의 말,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금 눈앞에 닥친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그들에게 닥친 비극을 떠올린, 너무나 뒤늦게 연대의 정신을 좇는 발걸음이 부끄러웠다.

한 길로 걷는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길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오월민중길의 시민군코스를 걸으며 걷지 못한 다른 수많은 길을 떠올렸다. 5·18민주항쟁 당시 전남지역 군 정보기관이었던 구 505보안부대에 여전히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녹두서점의 터에는 더 이상 시 낭송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그 모두를 뒤로하고 먼저 옛 적십자병원터<사적 11호> 앞으로 향했다. 내 친구와 가족이 피를 흘린다는 소식을 듣자 참을 수 없었던 광주 시민들은 의료진을 도와 부상자를 간호하고 식사를 준비하거나 헌혈했다. 광주 시민이 하나 되는 ‘대동 정신’이 빛나던 그 자리가 현재는 낡고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어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광주를 찾을 사람들이 소설 속에 등장하던 옛 적십자병원터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더욱 미어지지 않을까.
복원 중인 옛 전남도청 앞에는 역시 『소년이 온다』에 등장하던 그 분수가 있다. 그 일이 있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분수에 물이 나오냐고, 아직은 안 된다고, 아직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치던 은숙이 어딘가 있을 것만 같다. 분수 옆 시계탑 역시 대동 정신의 일부이다. 1980년 당시 일어난 비극을 전부 지켜보았으며 “시계탑은 알고 있다”라는 기사가 발간되자 신군부는 1980년대 중반 한밤중에 시계탑을 농성광장으로 옮겨 버렸다. 2013년 5월까지 엉뚱한 자리에 놓여 있던 시계탑은 시민들의 열망으로 2015년 1월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민의 기억을 헤집어 놓기 위해 시계탑의 자리를 옮기는 저열한 행태가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된다.

시민군코스를 따라 금남로<사적 4호>를 걸었다. 이 길을 걸으며 시민들은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앞에 자신을 내놓았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5월 18일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5월 19일부터는 수많은 시민이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21일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도 수십만의 시민은 다시 이 길을 걸었다.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알리고 대한민국이 민주국가가 되기 위해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외쳤다. 바로 이 길에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 있다. 진실 규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직도 5·18민주항쟁을 무장폭동이라 떠드는 이들의 부실한 논리는 이곳에 발 들일 수 없다.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5·18민주항쟁이 등재되기까지 광주 시민들은 외신 기자, 학생, 선생, 의료진 등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 전시관을 만들었다. 총탄이 날아다니던 와중에도 사재기나 약탈 같은 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식량 출고증과 석유 불출 확인서, 운행증 등으로 증명하고 있다. 피해자가 피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다. 광주의 심장을 보고 싶다면 시간을 들여 이 전시관을 돌아보길 권한다.

오월길을 걷고 난 뒤 장록습지로 향했다. 우리나라 1호 도심속 국가습지인 황룡강 장록습지는 196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연 지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2020년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을 지키는 버드나무 군락과 움푹 들어간 물길 덕분에 집중호우에도 화룡강에는 하천 범람의 피해가 없었다. 아름다운 습지에 대한 설명을 듣는 도중 고라니가 풀숲을 겅중겅중 뛰어갔다. 햇빛 조각을 띄운 강과 푸른 녹지, 그리고 고라니까지 있는 풍경은 일부러 연출이라도 한 듯 아름다웠다. 황조롱이와 멸종위기에 처한 삵과 수달, 새호리기, 흰목물떼새, 노랑부리저어새 등 829종의 생물종이 사는 이 습지는 생태적으로 굉장히 소중한 곳이다. 그러나 인근 주민들이 볼품없다는 이유로 습지 내 버드나무 군락을 제거해달라고 민원을 넣기도 했다는 이야기에 순례자들은 입을 딱 벌렸다.

광주의 정신이 담긴 오월길과 광주의 핵심 생태지역인 장록습지를 걷고 여수로 향했다. 여순항쟁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오동도 여순사건기념관에 도착하고 보니 놀라운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렇게 큰 사건을 알리기 위한 기념관이 여수세계박람회 유치기념관 안에 곁다리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 물론 세계박람회 유치를 기념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여수의 큰 비극이 그 경사에 가려지게 둘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도 여순항쟁에 대해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전시관을 떠올리면 여순항쟁 역시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걷기의 고단함은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있다. 우리가 삼 일 동안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지, 순례자들은 함께 보고 듣고 이야기할 것이다. 광주와 여수, 순천의 비극이 그저 한순간이 아닌, 현재의 우리의 손을 잡고 앞을 비춰주는 등대가 될 수 있도록, 민주주의와 생태가 서로를 딛고 서는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선명히 바라볼 것이다.